신라가 삼국을 통일할 수 있었던 이유는 뛰어난 철기를 보유할 수 있었고 그 이면에는 철광산과 철 및 철기를 생산할 수 있는 체계가 갖춰졌기 때문이다. 낙동강 하류역은 원료가 될 철광석, 연료로 사용될 목탄을 제작하기 위한 풍부한 산림, 각종 물자 및 인적 자원의 원활한 유통을 가능케 할 수로 교통이 발달한 곳으로서 제철 조업에 최적화된 조건을 갖추었다. 이를 반영하듯 5세기를 시작, 6~7세기를 중심 시기로 낙동강 하류역 밀양과 양산 지역에 집중해서 다수의 신라 제철유적(양산 물금유적, 밀양 사촌유적, 밀양 임천리 금곡유적, 밀양 정곡리유적)이 형성되었다. 이는 신라 철 및 철기 생산체계의 중심이 경주 일원에서 낙동강 하류역으로 이동한 양상이며 여기에는 국가적 관리 시스템이 작용했다고 볼 수 있다. 그동안 낙동강 하류역 신라 제철유적 형성 배경은 해당 지역에서 금관가야의 철광산 및 철 생산 시설을 장악하기 위한 것이며 이를 장악하면서 신라가 통일을 이룰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고 인식되었다. 이는 낙동강 하류역 전체 범위 어디에서도 가야 제철유적이 확인되지 않는 운데 추측한 바로써 밀양, 양산 지역에 금관가야가 운영한 제철소가 있었을 것이라는 전제한다. 그러나 지금까지의 발굴조사 현황을 살펴보면 신라 제철유적이 형성된 밀양, 양산 지역에서 금관가야가 제철 조업을 한 정황은 포착되지 않는다. 아울러 금관가야를 포함한 가야의 고지(故地)에서는 신라가 독자 운영한 제철유적은 없으며 가야 제철유적에서 신라가 최종적으로 점유하거나 영향을 끼친 정황은 있지만, 신라가 제철 조업의 주체라고는 단정할 수 없다. 신라는 금관가야 복속 후에 가야가 구축해 놓은 철 생산 기반을 적극적으로 활용한 것이 아니라 장악 후 억제하는 쪽에 가까운 정황이다. 대신, 신라는 특히 낙동강 하류역의 강을 경계로 해서 북쪽인 밀양, 양산에만 집중해서 철 생산 중심의 대규모 제철소를 운영하는데 여기에는 지역과 산품을 제한하는 국가 차원에서의 강력한 통제가 있었다고 볼 수 있다. 이처럼 강을 경계로 해서 북쪽에는 5세기를 시작, 6~7세기를 중심으로 운영된 신라 제철유적이 남쪽에는 4~5세기를 중심으로 운영된 가야 제철유적이 분포하는 이분적 양상은 결코 자연스러운 현상이 아니다. 이는 정복지 내에서도 낙동강 하류역 북안의 밀양과 양산에만 집중해서 제련 조업 중심의 대규모 제철 기지를 새로 구축하려 한 신라의 의지가 반영된 셈이다. 즉 신라의 전략적 선택이 작용한 결과로 볼 수 있다. 이로써 삼국을 통일할 수 있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을 뿐만 아니라, 5세기의 금관가야를 압박, 6세기 이후 복속에 이르는 동기가 되었을 수 있다.